비키니는 브래지어 타입의 상의와 팬티 타입의 바지로 구성된 여성용 수영복이다.최초의 비키니는 프랑스의 루이 레어드(1897~1984)라는 디자이너에 의해 1946년 7월 발표됐다. 당시 진행되던 비키니 섬 핵실험에 착안해 핵폭탄급 반응을 기원한다는 의미에서 비키니라고 붙였다. 국내에 비키니가 도입된 배경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없다. 다만 1961년 ‘한국 샤클라인’의 전신인 ‘백화점’이 ‘상어표’라는 브랜드로 상하의가 분리된 투피스 수영복을 출시하면서 국내 비키니 시장이 열린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 첫 비키니 모델은 배우 오경아(본명 황영숙)다. 그는 스무 살 때인 1965년 영화 ‘나는 운전사’로 배우 데뷔했다.당시 서구적인 미모와 글래머러스한 몸매로 최고의 전성기를 보냈다. 당대 최고의 스타였던 신성일 남궁원 윤일봉. 신일룡 최불암 배우 등과 함께 13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60~70년대를 풍미했다. 주요 영화 출연작은 잊을 수 없을 것(1974년) 표적(1977년) 30일간의 피크닉(1979년) 철수 무심(1969년) 홍콩에서 온 마담장(1970년) 54번가의 마담(1972년) 색깔 있는 남자(1985년) 등이다.노출에 민감했던 1960년대 오경아는 파격적인 초비키니를 입고 사진을 찍는다.
오경아가 비키니를 입고 화보를 찍은 것은 우연한 기회였다. 당시 그는 일본과 홍콩 등 해외를 오가며 수영복을 구입했다. 이때 한 사진작가에게 그녀가 들고 있던 수영복이 눈에 띄었다. 검은 것에 빨갛게 선이 그어져 있었던 것이다. 사진작가는 “이걸 입고 한번 찍어보자”고 제안했고, 오경아가 “그러자”고 동의해 ‘국내 최초 비키니 모델’이 탄생한다. 이를 입고 고쳐진 사진이 잡지 화보에 나오면서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킨 것이다.
오경아는 “초비키니를 입고 찍은 사람이 그 당시에는 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를 계기로 선데이서울 표지모델과 78월 달력모델 등으로 인기를 끌며 연예잡지의 1면을 장식하기도 했다.오경아는 또 한국 여배우 최초로 홍콩에 진출한 주인공이다. 70년대 당시 최고의 홍콩 액션스타 홍금보도 따라잡지 못한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그는 한류스타로서의 성공을 눈앞에 두고 다시 한국행을 결심한다.오경아는 그때 내가 너무 어렸다. 계속 그곳에 있었다면 아마 대단한 국제적인 스타가 되었을 것이다. 향수병에 걸려 나 “집에 돌아가게 해달라”고 한 지 2년 만에 서울에 왔다”고 말했다.https://thumbnews.nateimg.co.kr/view610///news.nateimg.co.kr/orgImg/my/2022/02/25/202202250118106457_1.jpg
그녀는 “내가 왔을 때는 이미 내 자리를 떠난 후배들이 차고 올라와서 내가 다시 원래 오경아가 되는 게 힘들었다. 차라리 거기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고 후회했다고 말했다.오경아는 결혼 시기를 놓쳐 파트너를 찾지 못했다. 결혼에 뜻이 있을 때는 나이가 들어 어쩔 수 없이 싱글이 됐다.
오경아는 “그 당시 정말 많은 인기가 있었을 때는 결혼이라는 게 저와는 거리가 멀게 느껴졌다. 결혼하면 나는 한 남자밖에 되지 않았고, 나는 만인의 연인이 되고 싶었다. 결혼에 대한 운명이 있는지 어쨌든 나는 결혼이 잘 안 됐다고 말했다.아이를 좋아하는 그녀는 입양과 위탁모를 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미혼에 뚜렷한 직업이 없어 자격 부족으로 이마저도 하지 못했다.현재는 애완동물 2마리와 생활하고 있다.